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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Nathan Milstein / Mendelssohn, Bruch; Violin Concerto,1954 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1961 (US)Capitol Records SP-8518 Label 6-Track Vinyl Back
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Nathan Milstein / Mendelssohn, Bruch; Violin Concerto,1954 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1961 (US)Capitol Records SP-8518 Label 6-Track Vinyl LP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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Tracks Info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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Side A;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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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
A-1. First Movement; Allegro Molto Appassionato   
A-2. Second Movement; Andante   
A-3. Third Movement; Allegretto Non Troppo, Allegro Molto Vivace  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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Side B;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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Bruch Violin Concerto in G Minor
B-1. a.First Movement; Allegro Moderato   
B-1. b.Second Movement; Adagio   
B-2. Third Movement; Allegro Energico  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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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redits;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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Violin - Nathan Milstein
Conductor - Leon Barzin
Orchestra - Philharmonia Orchestra
Composed By - Felix Mendelssohn-Bartholdy (tracks: A1 to A3) ,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Max Bruch (tracks: B1a to B2)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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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4 (US)Capitol Records P8243 Vinyl Mono LP 
1961 (US)Capitol Records P-8518 Vinyl Mono LP
1961 (US)Capitol Records SP-8518 Vinyl Stereo LP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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Nathan Milstein (1904. 12. 31-1992. 12. 21)
러시아 태생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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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세기.. 최고의 바이올린계의 거장을 꼽으라면
첫손에 꼽혀질인물들이 바로 '야샤 하이페츠'나
'다비드 오이스트라흐'일 것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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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지만 20세기 초, 중반엔
훌륭한 바이얼리니스트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있었는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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'헨델'과 '지네트 느뵈'가 
같은  콩쿠르에 출연해서 겨뤘다는 일화만 보더라도
당시 상황을 짐작할만 하다 하겠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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물론, '하이페츠'나 '오이스트라흐'와 비겨 
견줄만한 사람도 분명 있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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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세상을 타계하기 얼마 전..
"가장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"라 칭했다던 사람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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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칭찬에 야박하고 인색하기로 소문이났던 '하이페츠' 마저도
제자들에게 "그의 연주회 만큼은 꼭 가서 보라"고 권했을 정도로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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추종을 불허했던 연주자로..
단연 '밀스타인'이 거론되었지 않았을까 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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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79년, 11월 5일 어느 화창한 가을,
밀스타인은 이전에 이미 몇 차례나 연주를 가졌던
뉴욕의 '카네기 홀'에 들어섰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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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마 화려했던 그의 연주경력 가운데.. 어쩌면 그날은
가장 손꼽힐 만큼 특별한 날이었을런지도 모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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당시 그곳을 참관했었다 던 누군가의 얘기처럼
'바이올리니스트들의 국제회의' 라도 되는 것 마냥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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유,무명의.. 세상 모든 바이올린 연주자들이
거의다 모였었다 할 정도로
스타들의 잔치를 방불케했다고 전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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'요셉 푸흐', '이작 펄먼'..
'쥴리어드'나 '커티스 출신'의 젊은 연주자들이 삼삼오오로 모여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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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전히 최고의 기량을 선 보이던 밀스타인의
생명력 넘치는 기교를 감상하기 위해서 기다렸고
 
음악에 모든 인생을 바친 그에게
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앉았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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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렇게 1979년까지
열정적인 연주를 계속했던 거장 밀스타인...은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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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날 저녁 
바흐의 D단조 파르티타의 '샤콘느'를 초절적 드라마로 이끌었고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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세자르 프랑크의 'A장조 소나타'를
우아하고 당당한 현학적 긴장감 속으로 몰아 넣으며,
잊지 못할 저녁을 선물하며 우리곁에서 멀어져 갔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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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탄 밀스타인은 1904년의 그해 마지막 날,
지금의 우크라이나인
흑해 연안 오데사 (Odessa)에서 태어났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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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데사는
당시 연주가의 일대 산지였다 할수 있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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밀스타인이 태어난 길렐스 태생의 오이스트라흐 父子외에도
부근 지토미르 (Zhitomir)에서는 1915년 '리히테르'가 태어났다고 하니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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정말 그곳의 풍수는
음악의 명인들을 탄생케하는 대단한 지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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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14년까지 그는 그 지방의 명 교사로 명성이 자자했던 
스톨리아르스키(Stoliarsky) 에게 사사받았고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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후에 상뜨 페테스부르크 에서
이미 전 유럽을 상대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던 바이올리니스트
'레오폴드 아우어'의 문하생으로 다시 정식 음악교육을 받았다고합니다.
'
그 가르침 아래 1914년까지 다양한 음악교육을 받게 되는데,
동년.. 열렸던 학생 콘서트의 최종무대에서
5살의 어린 David Oistrakh와의 첫 만남은
 .
이후 많은 러시아 출신의 거장들과 교류하게 되는
신호탄이 되었다 전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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밀스타인의 정식 데뷔는 그 이듬해인 1915년으로
글라주노프가 직접 지휘하는 한 협주곡 무대에서 였다 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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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데뷔 무대는 대단한 반응을 몰고와
향후 5년간 러시아 전역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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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후  레오폴드 아우어를 따라 페테스부르크에 정착했고.
1923년 이후 계속되는 Vladimir Horowitz와의 합동공연으로
더욱 확고한 명성을 얻기 시작하는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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호로비츠와의 인연은 그가 솔로 로 활동하던 당시
호로비츠의 여 동생인 레지나 (Regina)가
그의 피아노 반주자로 리사이틀을 함께하게되면서 비롯됐었다 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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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후 그들은 Gregor Pyatigorsky와의
트리오 무대를 선 보이기도 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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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쨌든 호로비츠와의 듀오로서의 성공은
전 유럽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고
그로인해 고국 러시아를 떠나는 일이 잦아졌으며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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호로비츠와 피아티고르스키를 동반한
1925년의 유럽 연주여행이후 그는
고국 러시아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 
연주회 목적으로도 결코 러시아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전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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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26년 전설적 바이올리니스트
'외제느 이자이'에게 사사받기위해 브뤼셀을 찾았던 그는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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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자이로부터 "내게는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"는 말을
들었을 정도로 빼어났었다고 합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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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후 몇년이 지난 1929년..
호로비츠와, 피아티고르스키와 함께
미국에 정착하게된 밀스타인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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급기야 뉴욕 필하모닉과의 협연을 갖게 됐고
연주를 들었던 미국인들에게 환영을 받긴 했었지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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호로비츠는 비첨이 지휘한 1928년의 뉴욕 필로 데뷔..
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
'야성이 울부짖는 소리'나 '대초원에서 온 회오리바람'
등으로 불리며 스타덤에 올랐던 반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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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에겐 그와 유사한 찬사나
떠들썩한 에피소드를 동반한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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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바쁜 연주회를 가지던 중
전쟁 발발과 더불어 미국에 완전히 귀화해
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많은 자선 콘서트를 가졌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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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8년 다시 유럽 연주회에 나서
전통의 비엔나, 루체른, 잘츠부르크 페스티발등에 참가했고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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토스카니니, 모리나리, 클라우스, 푸르트벵글러,
부르노 발터, 크나퍼츠 부쉬, 쿠제프츠키, 스토코프시키 등의
20세기를 풍미한 많은 지휘자들과 협연무대를 가졌습니다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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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때.. 그는 바이올린으로
많은 곡들을 작곡하거나 편곡하기도 했다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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밀스타인이 언급했듯 호로비츠나, 피아트고르스키, 토스카니니,
모리나리 등과의 협연 무대로도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드높혔지만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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가장 독자적인 해석을 남긴 독주자로서 더 유명한 이유는
바로 당시의 작곡했던 많은곡들과
편곡들에 기인한 때문인듯 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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밀스타인은 흔히 러시아 학파로 알려져 있는데
이는 본능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신비로움이
지성에 의해 모두 제어 받는
완벽주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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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의 날카로운 기질은
확실한 연습이 바탕이 되어 더더욱 확고해졌고,
유려한 라인은 고전적이며서 순수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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선율 역시 크지는 않았지만,
힘이 실려 연주되어지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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밀스타인 또한 그러한 파워를 악기에 싣기 위해
여러 차례 보잉 스타일을 바꿔나갔는데,
물리적 힘에 의한 압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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스스로의 연습에 의해 철저히 빠른 동작을 몸에 익힌
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때문이었다 생각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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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의 인토네이션은
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났는데
이유는 비브라토가 지나치게 크거나
시간이 지나서도 물리기 않았기 때문일것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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밀스타인의 주요 협주곡에 대한 해석은
일종의 고귀함과 아울러
자극적인 감성도 혼합되어 있다는 평을 받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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밀스타인이 연주한 수많은 레파토리 중에서
특히 < 파가니니아나 >, 또는 베토벤 < 바이올린 협주곡 >의
카덴자 부분 등에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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최고의 테크닉을 보여준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것 또한
그와 같은 이유에서 일것 같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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녹음 분야에서도 역사적인 기록 하나를 남겼는데.. 이는,
1945년.. 브루노 발터와 뉴욕 필을 동반한
멘델스존 협주곡 녹음 (Columbia) 이 바로
세계 최초의 LP 발매라는 점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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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후 커티스 음악원과 더불어
유럽의 여러곳에서 마스터 클라스를 가졌고
그의 섬세한 성격만큼이나 학생들에게도
좋은 교사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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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87년 자동차 사고로 팔을 다치지만 않았더라도
더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도 쇠퇴하지 않았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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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지만 그는 이 사고 후 런던에서 지내다가,
88세 생일을 불과 열흘 앞둔 1992년..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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60대 이전 훌륭한 연주력을 선보이던 연주자들도 
70대까지 명연을 남기는 사례는 그리 많지않다 생각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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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반적으로 현악기 연주자들이 건반악기 연주자들보다
테크닉이 빨리 쇠퇴 한다는데,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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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지만 밀스타인은 달랐습니다.
그가 70세에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는
이 레파토리의 '필청 음반'으로 꼽히며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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71세 녹음인 리사이틀집 또한
그의 기량에 조금의 변동도 없는 앨범으로
정평이 나있기 때문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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80대 역시
사고로 중단하기 이전까진 리사이틀을 이어갔습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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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의 성격이 좀 무뚝뚝한면은 있지만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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무엇보다도 철저한 곡 해석,
정평 있는 기술과 '은색으로 빛나는' 아름다운 음색에
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으며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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특히 전문가들에게
인기가 높았던 연주인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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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68년에 프랑스 정부로 부터
'레종 도뇌르'(Officier de la Legion d'honneur)를 수상했으며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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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86년 베니스에서
'음악의 평생 공로상'(A Life for Music)을 수상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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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의 연주에 언제나 꼬리표처럼 되 뇌여지던 글이있어
오늘 이글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줄이려합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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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그의 빠른 동작, 살아있는 눈동자, 빛나는 검은 머리,
그리고 그의 강한 중간치 체격들은
젊음은 그에게 항상 머물러 있을 듯한 생각이 들게 한다.

즉각적이며 거침없고, 무해하며 순수한 그의 모습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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누구도 그를 비판하지 않도록 만들었고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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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의 바이올린은 그의 팔이나 다리만큼이나
인체의 일부인 양 느껴졌다." ...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- 피아티고르스키 -

내용출처 (2006년5월~8월사이 위키 및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웹 고전음악 싸이트 18개의 포스트를 기본 베이스로 편집)
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A-1. First Movement; Allegro Molto Appassionato

Chamber 'n Aria 2010. 4. 25. 22:34